인간은 세상을 바라볼 때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유비쿼터스적인 존재가 아니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지금 여기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관적입니다.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 객관적으로 보는 자기초월능력도 갖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능력인데, 에덴에서 타락한 후에도 인간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 들어가 타인의 심정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 나만의 시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다양한 시각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자기만의 각도에서 보질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듯 내 인생을 내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그분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나면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은 지 세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아직 내 겉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면 속사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던 옛 관점을,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새 관점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하나님도 생각하시리라 단정합니다. 내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니 하나님도 겉모습으로 사람을 보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스타일에 맞춰 구겨 넣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순간, 제일 약한 순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지낸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하나님한테 “왜 볼 것도 없는 사람을 쓰시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이 뭐라 답하실까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너를 쓰지 못한다”라고 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나는 정말 약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방식대로 강한 자를 선택해 강한 자를 제압하는 것은 복음의 방식이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내가 잘 날 필요도, 똑똑해야할 이유도, 어떤 배경을 든든하게 장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겸손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은 그런 나를 쓰기로 선택하십니다. 나도 없지만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즐거이 건네주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런 나를 세상의 통치자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일에도 쓰실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 잘난 사람, 깨끗한 사람, 야무진 사람만 선발하지 않으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저야말로 주의 종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를 보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와 허물, 연약함, 실패,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을 가져가셨습니다. 동시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 거룩하심, 용서, 영광, 지혜, 생명까지 몽땅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놀라운 교환이 이뤄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내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믿음으로만 이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주 예수를 믿으니 온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송용원 목사(서울 은혜와선물교회)